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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문헌 목록 〉14. 14世 〉19. <부정공>성균진사선천공휘유원묘표(成均進士仙川公諱維元墓表)
1. 문헌 목록 〉14. 14世 〉21. <부정공>죽은공휘유원묘갈명(竹隱公諱有源墓碣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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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부정공>증가선대부호조참판겸동지의금부사오위도총부부총관공휘유장묘갈명(贈嘉善大夫户曹參判兼同知義禁府事五衛都摠府副摠管公諱維章墓碣銘)
贈嘉善大夫户曹參判兼同知義禁府事五衛都摠府副摠管公諱維章墓碣銘 公諱維章字文叔趙氏貫玉川高麗侍中諱璋爲鼻祖三傳而諱元吉與圃牧同德恭讓朝定策元老晋封玉川府院君號農隱諡忠獻是生諱瑜典農副正當短喪之制廬墓盡制麗社既屋守罔僕義太宗朝不就漢城判尹之徵則杜門洞九逸民之一也世稱虔谷先生筮遯于順天之富有縣爲子孫世庄 世宗朝旌表其閭兩世俱享鄉祠其後相好亭四昆季次第榮顯株連於叔父節愍公禍不復通籍于朝以友于之篤聞于一世第三參禮察訪諱智崙於公爲七世勵節校尉諱大春號三灘與河西先生白玉峯最友善禮賓寺參奉諱懋號撫松亭宣敎郎 贈司僕寺正諱晬乃其下三世也通德郎 贈左承旨諱時億即公之考也妣玄風郭維城之女也 孝宗壬辰 肅宗癸未正月三日卽生卒也壽五十二葬于九龜山下壬原後用子朋錫推恩貴贈亞卿啣元配慶州偰氏次配白川楊氏三配坡平尹氏俱 贈貞夫人墓各異兆曰祺錫元配出曰圭錫次配出曰朋錫三配出以壽階嘉善長房孫益望二房孫聖望懿望三房孫德望五房孫顯望曾玄以下不盡擧公生而雋爽風儀出群天性至孝善事二親志軆之養少無欠闕及丁憂情文備盡與弟同室終不析財有相好亭之遺模甞出郊見禾稼碩茂問僮僕而始知家作時有世裕之貨凡貧交窶族有吉凶大事佽助不尠是以產漸落而不曾有嗟悔色從俗攻擧業文藝擅場累不利於成均遂不屑榮進而止病鄉俗之闇陋遵親命移寓于湖西之連山金佐郎鎭泰金監司鎭玉樂爲之主是時湖西多賢士大夫亶出於陬友之意也甫十年爲水土失宜還寓于本省之南原與黃雲溪信龜爲至友既而嘆曰康節之返居洛陽晦翁之睠戀婺源良有以也遂還大龜故庄就所居東山建別業蒔花種竹日邀賓友酬唱繽紛爲送老計今亭雖廢而行路指點咨嗟曰此某公之亭之墟此其大略也噫士君子庸言庸行不失古家箴規猶足以化洽鄉閭遵率後進况公之庸言庸行如彼其無疵復有可述可傳之美蹟自知數奇不趨榮名較諸世之以冒與倖而求進者則其雅尚之操何如也且貴義輕財仰賴甚衆較諸世之營私嗜利錐刀是競者則其任恤之風果何如也晩卜菟裘逍遙於江風山月之間甘作盛時隱淪較諸世之矻矻奔忙自陷俗臼者則其脱灑之趣竟何如也並可以不朽於來世者也狀德之文晚出於傍裔寅錫手叙事有法其言宜信後孫漳奎善奎將謀隧石命箕黙以銘箕黙安敢爲敷演語以玷公錦褧之實地也哉銘曰是維忠厚長者藏歩限五十戒樵牧入人深者郡無徵垂二百年輿論溢 濟州 梁箕黙 謹撰 증가선대부호조참판겸동지의금부사오위도총부부총관공휘유장묘갈명(贈嘉善大夫户曹參判兼同知義禁府事五衛都摠府副摠管公諱維章墓碣銘) 공의 휘는 유장(維章)이요 자는 문숙(文叔)이며 옥천인인데 부정공 휘 유의 후예로 증조는 예빈시 참봉 휘 무(懋)요, 조는 선교랑 증 사복시정 휘 수(宣敎郎贈司僕寺正諱晬)며 고는 통덕랑 증 좌승지 휘 시억이고, 비는 현풍곽씨 유성의 따님이다. 효종 임진년(一六五二)에 출생하여 숙종 계미년(一七○三) 정월 三일에 향년 五十二세로 별세하니 구귀산(九龜山)아래 임좌 언덕에 안장하였다. 뒤에 아들 붕석(朋錫)의 수귀추은(壽貴推恩)으로 증직을 받았다. 첫부인 경주설씨(慶州偰氏), 둘째부인은 백천양씨(白川楊氏), 세째부인 파평윤씨(坡平尹氏)는 함께 정부인(貞夫人)에 증봉되었으며 묘소는 각각 다른 곳이다. 남 기석(祺錫), 정석(廷錫)은 원배출이고 규석(圭錫)은 차배출이며 붕석(朋錫)은 삼배출인데 수계(壽階)로 가선(嘉善)에 증직되었다. 장방손 익망(益望), 차방 손은 성망(聖望)·의망(懿望) 三방손 덕망(德望) 四방손(顯望)이요 증손 현손 이하는 다 기록하지 않는다. 공은 용모가 준수하고 명쾌하여 풍의(風儀)가 특이하고 천성이 효성스러워 부모를 잘 섬겨 뜻과 몸을 잘 봉양하고 초상에는 예제를 다하였으며 아우와 함께 동거하고 마침내 분재치 아니하니 상호(相好)의 유풍이 있었다. 일찍 들에 나가 벼이삭이 익은 것을 보고 동복(僮僕)에게 물어 비로소 집안 농사인줄 알았고 유산(遺產)이 풍요하므로 가난한 친족의 길흉 대사에 보조를 계속하니 이로부터 가산이 점차 감축하되 슬피 뉘우친 적이 없었다. 세속에 따라 과거 공부에 힘써 문예(文藝)가 과장(科場)을 압도하였으나 여러 번 낙방하니 드디어 영진(榮進)을 중지하고 향속(鄉俗)의 고루함을 탄식하고 친명에 따라 호서 연산(連山)에 옮겨 우거하며 좌랑 김진태(金鎭泰)와 감사 김진옥(金鎭玉)등과 더불어 종유하였으니 이때 호서에 어진 사대부가 많으므로 다만 익우(益友)를 교제할 뜻으로 출발한 것이었다. 겨우 十년만에 수토(水土)가 맞지 않아 남원(南原)으로 옮겨 운계황신구(黃信龜)로 더불어 교유하고 탄식하되 소강절(邵康節)이 낙양에 반거(返居)한 것과 주문공(朱子)이 무원(婺源)을 돌아보며 생각한 것이 진실로 이에 있다 하고 드디어 대구(大龜) 고향으로 돌아와 먼저 살던 동산에 별장을 세우고 꽃씨를 뿌리고 대를 심으며 날마다 손님과 벗을 맞아 서로 수창(酬唱)하며 말년을 보내었다. 이제 그 정자(亭子)가 무너졌으나 길가는 사람이 가리키며 이것이 공의 정자 터라고 차탄하니 이것이 그 대략이다. 아! 사군자의 떳떳한 말과 화한 행실이 고가(古家)의 규범을 잃지 아니하고 오히려 족히 향리를 순화하며 후진을 도솔(導率)한 것이 이와 같으니 어디에 또다른 이와같은 길이길이 전할 아름다운 행적이 있으랴. 스스로 불우함을 알고 영화를 버리니 모든 세상의 요행으로써 진취를 구한 자와 비교하면 그 고상한 지조를 어떻다 하리오. 또 의리를 존중하고 재물을 경시하여 의중(倚重)이 많으니 그 사리사욕에 눈이 어두운 자에 비하면 그 임휼(任恤)풍화가 과연 어떻다 하겠는가. 만년에 은거할 땅을 얻어 강바람과 산 달빛사이에 노닐며 성세은사(盛世隱士)로 자처하니 그 노심초사하여 화사(華奢)에 분망한 자에 비하면 그 탈속쇄락(脱俗灑落)한 자취를 마침내 어떻다 하랴. 이 모두가 다 길이길이 썩지 아니할 것이다. 방예(傍裔) 인석(寅錫)이 기록한 행장의 말과 일이 법도가 있고 신실하며 후손 장규(漳奎)·선규(善奎)가 장차 비를 세우고자 기묵(箕黙)에게 명(銘)을 청하나 기묵이 어찌 감히 말을 보태어서 비단옷의 실상을 더럽히겠는가. 다음과 같이 명한다. 이는 오직 충후장자의 유택이니 是維忠厚長者藏 五十걸음내에 초목을 경계하노라. 歩限五十戒樵牧 사람의 폐부에 새긴자 어찌 증거가 안되랴. 入人深者郡無徵 영구히 여론이 전하여 넘치리라. 垂二百年輿論溢 濟州 梁箕黙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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